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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렇게 다가오다

페인트

이희영 장편소설, 창비

창비 청소년 문학 89, 페인트

페인트는 우리가 칠하는 페인트가 아니라 페어런츠 인터뷰의 은어이다.(Parent's interview)

말 그대로 부모 인터뷰이다.

시간적 배경은 미래이다. 

아이는 나았지만  기르기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국가에서 NC센터를 설립하고 그곳에 아이들을  맡길 수 있게 한다. 나라에 아이를 버린다고 표현하면 불편할까? 어쨋든 합법적으로 만들어진 고아라고 할 수 도 있겠다.

국가의 아이들, Nation's children

센터에서 아이들은 엄격한 건강관리, 엄격한 규칙,교육 등에 의해 길러지며

13세 이상부터는 입양이 되어 센터를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어린 아이들을 입양시키면 입양 후에 일어날지 모르는 불합리한 것들, 예를 들면 아동학대 등을 확실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청소년에 접어드는 아이들을 입양시킨다. 

또한 입양하려는 부모가 아이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부모 면접 즉 페인트를 3차 이상 봐서 갈지 말지 결정을 하게 된다. 입양하려는 부모가 아이앞에서 잘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입양을 하면 아이도 생기지만  나라에서 보조를 많이 해 주기 때문에 돈을 위해 입양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  그래서 센터 아이들을 돌봐주는 가디들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 입양 부모를 선택하고 입양 후에도 나라에서 입양 가족의 생활을 관리한다.

센터에서는 아이들을 태어난 달과 숫자로 부른다.  주인공 이름도 제누301이다.

입양이 되어서야 정식 이름과 성이 생기고 센터출신이라는 꼬리표는 떼어지게 된다. 사회와 격리되어서 부모없이 자란 존재라는것을 지워주어 사회에서 차별없이 적응할 수 있게 해 준다.

제누301은 센터를 나가야만 하는 18세가 가까워오지만 입양되기를 거부하고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한다.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사회에서의 차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속깊은 아이이다.

좋은 부모, 좋은 자식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센터에서 페인트를 통해 만난 부모가 더 좋은 부모일까? 아니면 부모 노릇은 못 해도 자신의 친부모와 사는 것이 더 좋은 것일까? 왜 사람들은 근본을 중요시하는 것일까? 센터 안에서 교육 받은 아이들이 센터 밖의 아이들보다 더 규칙과 규율을 잘 지키는데.

제누301은 마지막으로 해오름과  서하나 라는 부부와 페인트를 한다. 

해오름은 아빠에게 상처가 있고 서하나는 엄마의 못이룬 꿈을 꾸기 위해 희생된 상처를 갖고 있어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이 없어 아이를 낳지 않았다. 글을 쓰는 서하나는 센터 아이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고  정부의 지원금 때문에 페인트를 신청한다.  수수하고 준비되지 않은 그들이 가디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러한 점에 끌린 제누는 3차까지 페인트를 한다.  서로 친구처럼 말도 잘 통하지만 제누는 홀로서기를 선택한다.

제누는 사회로 홀로 나가서 잘 살 수 있을까? 

고아라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았지만 결국은 사회의 편견에 부딫혀 자살을 시도하게 되는 영화 헬로 고스트의 상만이가 생각난다. 제누도 그렇지 않을까.  세상의 편견은 아주 견고해서 깨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어려운 것에 도전을 하는 제누를 응원한다.

 

아이들이 읽어도 좋지만 부모가 읽어도 아이와 함께 자라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부모입장에서 몇 구절을 찾아봤다.

 

가족이란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먼발치라는 말의 뜻은 시야에는 들어오지만 서로 대화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떨어진 거리, 라고 한다. 그게 부모와 자식 간의 마음 속 거리가 아닐까. 서로를 바라보지만 대화는 할 수 없는 거리 말이다.   -자꾸 간섭하고 싶을 때 되뇌이기

 

제가 말 할 때 아 그래? 그럼 다른 것을 해 볼까? 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를 원해요- 아이가 내 의견에 따라주기 않을 때 되뇌이기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건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 같아요. 많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자기 약점을 감추고 치부를 드러내지 않죠. 그런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가 무너져요.-완벽한 부모 컴플렉스로 스트레스 받을 때 되뇌이기.